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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남 마산을 방문했을 때 이 고장 출신의 복서 한 명이 떠올랐다. 1978년 뉴델리 아시안게임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선발되고도 이런저런 사연으로 불참한 비운의 복서 조용래란 복서가 주인공이다. 1958년 경남 함안태생의 조용래는 1973년 마산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마산중앙체육관에서 마산복싱의 선구자 류 명국 선생의 장남 유인구 관장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입문한다.
그해 조용래는 전국 학생 신인대회 준결승에서 아깝게 패했다. 1974년 마산공고에 진학한 조용래는 2년간 김광민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별다른 실적이 없었다. 김광민(조선대)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LW 급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박태식(육군)에게 분루(憤㴃)를 삼킨 복서였다.
고교 졸업반인 1976년 비로소 조용래는 가장 귄위 있는 제6회 대통령 배 제57회 전국체전을 휩쓸며 최우수복서(MVP)로 뽑히면서 주목을 받는다. 당시 조용래의 전국체전 고등부 금메달은 경남팀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그해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제30회 전국 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조용래는 1972는 뮌헨 올림부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4년간 부동의 국가대표로 활약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부동의 언터처블(Untouchable) 박태식과 맞대결한다.
1952년 광주태생의 박태식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은메달 1975년 제1회 킹스컵대회에서 최우수복서로 선정된 무적함대였다. 이 대결에서 고교생 복서 조용래는 176Cm의 훤칠한 키에서 내려찍는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로 한차례 녹다운을 탈취하면서 복싱사상 최대의 이변을 일으키며 국군 아저씨 박태식(육군)에 5ㅡ0 판정승을 거둔다.
김사용(경희대) 정용석(청주복싱) 김주석(중앙대) 김광민 (조선대)등 역대급 복서들을 차례로 제압하면서 올림픽에 2회 연속 출전한 25살의 육군 대표 박태식이 18살 고교생 조용래에게 완패한 것이다. 이 경기를 끝으로 금강불괴(金剛不壞) 같은 아성을 구축한 박태식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고 조용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1977년 경남대학에 진학한 조용래는 우측 팔꿈치에 부상을 입고 슬럼프에 빠지면서 장상기 (부산 국제) 박남철 (원광대)에 연패 상승세에 제동이 걸린다. 1978년 웰터급으로 체급을 올린 조용래는 제2회 김명복 배 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 전열을 추스린다. 1979년 조용래는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김수영(동국대) 천갑수(한국체대)를 긴 리치를 이용한 정확한 원투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2회 RSC 승을 거두고 재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맞이한 최종선발전 상대는 슬러거 나경민 (해태제과) 이었다.
1955년 강원도 춘천태생의 라경민은 1979년 뉴욕 월드컵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강타자였다. 이대결에서 현란한 테크닉으로 라경민의 예봉(銳鋒)을 봉쇄(封鎖)하고 5ㅡ0 판정승. 2체급에서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표로 선발된다. 조용래에 패한 라경민은 1981년 5월 프로에 진출 1983년 5월 동양 미들급 챔피언 박종팔의 타이틀에 도전 7회 KO승을 거두면서 올림픽 선발전에서 조용래에 패한 아쉬움을 달랬다.
한편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대통령 배. 킹스컵.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출전 메달을 획득하면서 전력을 끌어올리던 어느날 그러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한국대표팀은 올림픽 출전이 무산된다. 이 무렵 조영래의 위상(位相)은 신숭문(동아대)를 비롯한 부산 경남지방 복서들에겐 하늘의 별처럼 선망의 대상이었다. 경남대학을 졸업한 조용래는 수경사에 입대한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조용래는 LM급으로 출전 이남의(한국체대) 신준섭(원광대)을 꺾고 국가대표에 발탁 된다.
마지막 대회에서 명예롭게 금메달을 따내고 링을 떠나겠다는 신념으로 훈련하던 어느날 조용래는 스파링을 펼쳤다. 그러나 그만 오른손 엄지에 골절상(骨折傷)을 입고 퇴촌한다. 결국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조용래의 대타로 이남의가 출전한다. 본선에서 이남의는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위를 선양하였다.
여담이지만 1964년 동경올림픽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조. 프레이져(미국)도 선발전 우승자 버스터. 마티스가 조용래처럼 대회를 앞두고 스파링하다 손가락 골절을 당해 부상으로 빠지면서 조. 프레이져가 대타로 합류 금메달을 획득한 전례가 있었다.
한편 조용래가 복싱을 접을 무렵 어느 날 경남대 총장 박재규는 조용래를 불러 내가 잠시 일본에 출장을 다녀올 예정이다. 그러니 그 후에 만나서 차분하게 너의 진로(進路)를 함께 상의하자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1944년 마산태생으로 제26대 통일부 장관을 지낸 박재규는 박정희 정권 시절 경호실장을 지낸 그 유명한 피스톨. 박 박종규의 친동생이었고 김명복 박사의 사위였다.
그러나 조용래는 박재규 경남대 총장을 단 한 차례도 찾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날 조용래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때 박재규 경남대 총장을 찾아가서 “총장님 교직원 자리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할 걸 하면서 웃었다. 이처럼 조용래 그는 영혼(靈魂)이 맑고 순수한 복싱인이었다. 1989년 지도자로 변신한 필자는 당시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위촉된 조용래와 인연을 맺었다. 겸손하면서 올곧은 성품을 지닌 조용래는 복싱 선. 후배들과 대인관계가 좋았던 복싱인이었다. 지금은 고향 마산을 떠나 교사 출신의 아내 그리고 딸과 함께 제2의 고향 울산에서 지난 영욕이 점철된 지난 추억을 속 잠바에 감추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역사란 장구한 세월 속에서 쓰여진 인간의 기록임을 다시 한번 되 세기면서 비운의 복서 조용래의 인생 3막 그의 무궁한 건승 바란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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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saissue.com/View.aspx?No=4155616
[조영섭의 복싱 열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선발되고도 출전하지 못한 비운의 복
얼마 전 경남 마산을 방문했을 때 이 고장 출신의 복서 한 명이 떠올랐다. 1978년 뉴델리 아시안게임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선발되고도 이런저런 사연으로 불참한 비운의 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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