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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무죄로 되돌아본 국가폭력과 사법살인의 기록

 

1975년 4월 9일 새벽,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등 8명이 서대문구치소에서 사형당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확정판결 뒤 불과 18시간 만에 이뤄진 사형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공안사건이 아니었다. 유신체제는 전국으로 번지던 반유신 움직임을 짓누르기 위해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가 존재한다고 몰아세웠고, 이를 통해 정권의 위기를 공포정치로 돌파하려 했다. 국가기록원과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당시 발표 내용은 이후 상당 부분 조작으로 드러났다.

비극의 핵심은 수사만이 아니었다. 더 깊은 상처는 재판이 권력의 속도를 따라갔다는 점에 놓여 있었다. 고문과 가혹행위로 작성된 진술이 증거처럼 취급됐고, 최종심 직후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면서 재심과 구제의 가능성마저 사실상 차단됐다. 그래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사법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기억돼 왔다.

역사는 그러나 끝내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은 재심에서 8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관련자들이 폭행과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진술이 조작됐고, 그 진술의 임의성과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32년 만의 무죄였다.

그럼에도 국가폭력의 후유증은 판결 하나로 소멸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2년, 정부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에게 이미 지급된 배상금 일부와 지연이자의 반환 문제를 둘러싸고 법원의 화해권고를 수용한 결정을 환영하며, 실질적이고 완전한 피해회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억울한 죽음 뒤에도 유족들은 오랜 시간 또 다른 싸움을 감내해야 했다.

4월 9일은 단지 여덟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짜가 아니다. 국가권력이 수사기관을 동원하고, 사법부가 그 폭주를 멈춰 세우지 못할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잔혹하게 훼손되는지를 새겨놓은 날이다. 그 새벽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권력이 법을 무기로 바꾸는 순간을 끝까지 감시하라는 현재의 명령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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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https://sisaissue.com/View.aspx?No=4036258

 

[김성민의 역사추적]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8명이 사형된 날…법정이 형장이 된 유신의 새벽 -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75년 4월 9일 새벽,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등 8명이 서대문구치소에서 사형당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뒤 채 하루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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