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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의 장례가 독재의 시대를 끝내고 시민의 나라를 열어 젖힌 날

1987년 7월 9일, 대한민국 현대사는 한 청년의 마지막 길 앞에서 다시 쓰였다.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이날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장례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부독재의 폭력에 대한 시민의 거대한 응답이었고, 민주주의가 더 이상 권력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라는 사실을 선언한 역사적 행진이었다.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 9일, 다음 날 예정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열린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여했다. 연세대 정문 앞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고,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이미 끓어오르던 국민적 분노에 다시 불을 붙였다.
7월 9일 장례 행렬은 연세대학교를 출발해 신촌로터리와 서울시청, 광화문을 지나 광주로 향했다. 이날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약 1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모였다. 한 청년의 영정 앞에 모인 시민들은 울었고, 분노했고, 끝내 침묵하지 않았다.
그날의 장례는 죽은 자를 보내는 의식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이 역사의 책임을 떠안는 순간이었다. 이한열의 피격 사진은 한국 사회에 국가폭력의 민낯을 각인시켰고, 그의 죽음은 6월항쟁의 거대한 물줄기를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이한열 열사의 기록을 6월 민주항쟁을 대변하는 중요한 현대사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1987년 7월 9일의 의미는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 없는 시민들의 거리, 학생들의 외침, 어머니들의 통곡, 그리고 청춘의 희생 위에 세워진 공적 유산이었다. 이한열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이름을 넘어, 권력의 폭력에 맞선 시민 존엄의 상징이 됐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직선제와 표현의 자유, 권력 감시와 시민 참여의 권리는 그날 거리에서 흘린 눈물과 피를 기억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매일 지켜야 할 약속이다. 역사를 잊는 사회는 언제든 폭력의 언어로 되돌아갈 수 있다.
1987년 7월 9일, 대한민국은 한 청년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그날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더 가까이 불러왔다. 이한열의 마지막 길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이 권력 위에 서는 나라로 가는 길의 시작이었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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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역사 추적] 1987년 7월 9일, 이한열 민주국민장 - 시사의창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87년 7월 9일, 대한민국 현대사는 한 청년의 마지막 길 앞에서 다시 쓰였다.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이날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장례는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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