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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 3월호를 못 본 독자를 위해 경회루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경회루지는 원래 백악산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노면으로 흘러드는 습지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에 이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정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습지에 지은 작은 정자가 자주 기울자 태종 이방원(1412년)은 노비 출신 건축가 박자청에게 이곳에 연못을 넓게 파고 정자를 지어서 정비하라고 명하였다. 태종은 자신의 생각보다 과하게 정비된 경회루지만 내심 만족하여 하륜에게 작명을 맡겨 ‘경회’(왕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는 경사스러운 모임)라 이름 짓고 경회루의 현판을 양녕대군에게 쓰게 하였다. 성종 때(1474년)는 경회루의 대대적 보수가 필요하여 새로 짓는 수준의 공사를 하였는데 이때 1층 바깥쪽 사각기둥에 용과 연꽃을 새겨놓았다. 이것을 본 유구(지금의 오키나와)국 사신이 용 그림자가 연못에 비춰 하늘을 나르고 연꽃을 희롱하는 듯 조선 제일의 장관이라는 평을 남겼다.

 

경복궁 경회루 ©pixabay
경복궁 경회루 ©pixabay
경복궁 경회루 ©pixabay

[시사의창 2024년 4월호=민관홍(칼럼니스트, 우리문화숨결 경복궁해설사)] 임진란 때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에 탈 때 경회루도 소실되었고 273년간 폐허로 있다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영건하면서 경회루도 복원되었다.

 

이때 정학순이 경회루를 연구한 ‘경회루 삼십육궁지도’를 바쳤는데 여기서 경회루가 철저하게 주역의 원리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것은 3월호 경회루 1편에 밝혔다.

 

경회루지와 경회루는 인왕산의 화기로부터 경회루 동쪽의 중요전각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명당수와 목조건물의 화재를 대비한 방화수의 확보라는 기능적인 면도 있었다. 목조건물은 화재에 취약하여 경복궁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두려워하여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고 한다. 화재방지를 위해 육조거리의 해태나 불과 물을 동시에 다스리는 용을 많이 조각하였고 그 밖에 불을 막는 서수(상서로운 짐승)를 조각해 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회루 삼십육궁지도’에 따르면 경회루는 물의 원천 그 자체로 화마를 막는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경회루는 정면 일곱칸에 측면 다섯칸으로 7X5=35, 삼십오 칸인데 정학순은 삼십육 궁이라고 하였다.

 

이는 삼십오 칸의 중심에 오행 북현무의 신묘한 수 1이 물의 생성수로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도 있어 삼십육 궁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6은 오행 북현무의 물의 완성수로 완성수 6의 6제곱에 물의 생성수 1로 이루어진 경회루는 물의 원천인 것이다.

 

이제 봄이 무르익는 4월이다. 고궁에 꽃도 많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고궁의 정취를 즐기러 오실 것이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궁을 스쳐 지나가듯이 다녀갈 것이지만 그냥 왔다 가기만 해서는 개인사에 의미가 없을 것이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이 그 시간과 공간에 남긴 말과 행동, 그 자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시저만이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미시사와 개인사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여러분이 경복궁에 입장하여 금천의 영제교를 건널 때, 경회루지의 함홍문을 건널 때 여러분의 역사를 만드시기를 권한다.

 

경회루지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에 인공섬(신선이 사는 해동의 산 셋을 형상화) 3개를 만들고 동쪽의 제일 큰 섬에 298평의 경회루를 지은 것이다.

 

1층은 48개의 돌기둥을 세운 개방된 구조이고 2층은 누마루로 정면 34.4미터, 측면 28.5미터 높이 21.5미터로 현존하는 규모가 가장 큰 전통 목조건물로 근정전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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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경복궁 경회루 ②] 경회루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 - 시사의창

시사의창 3월호를 못 본 독자를 위해 경회루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경회루지는 원래 백악산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노면으로 흘러드는 습지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에 이곳에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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