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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에 맞선 시민의 존엄,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아픈 기원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고립됐다. 거리에는 계엄군이 투입됐고, 대학생과 시민을 향한 폭력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의 분노로 번졌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작된 충돌은 금남로와 전남도청으로 확산됐고, 광주는 더 이상 한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가장 절박한 질문이 됐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지역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운동이다.

5·18의 핵심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생명을 억압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의 주체로 일어섰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시민들은 계엄 해제와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폭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광주의 저항은 총칼에 맞선 무모한 반항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최후의 항변이었다.

당시 광주는 외부와 차단된 채 왜곡과 침묵 속에 갇혔다. 그러나 진실은 오래 묻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 기록 사진, 문서, 재판 기록, 피해자와 유가족의 끈질긴 싸움이 역사의 어둠을 밀어냈다. 1988년 국회 광주진상특위를 통해 진상조사가 본격화됐고,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공식 사망자 154명을 비롯해 5,06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5·18이 오늘까지도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과거의 비극을 추모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할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언론과 사법, 정치가 침묵할 때 시민의 생명이 얼마나 참혹하게 짓밟히는지를 증언한다. 동시에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의 연대가 얼마나 강인한 역사의 힘으로 남는지도 보여준다.

5·18 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가유산청은 이 기록물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 요구 활동과 이후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과정에서 생산된 문건·사진·영상 등을 포괄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5·18이 한국만의 상처가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편적 기록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5·18은 여전히 완결된 역사가 아니다. 왜곡과 폄훼는 반복됐고, 발포 명령 책임과 국가권력의 조직적 은폐 문제는 오랜 시간 진상규명의 과제로 남았다. 2018년에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이는 역사가 스스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진실을 향해 지속적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광주의 5월은 특정 지역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오늘의 자유가 어떤 희생 위에 서 있는지를 묻는 양심의 거울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가폭력을 경계하고, 시민의 권리를 지키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지속적인 사회적 실천 속에서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는 패배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쓰러졌지만, 그들이 남긴 질문은 군홧발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오늘의 권력도, 언론도, 시민사회도 자유로울 수 없다. 광주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5·18은 추모의 날을 넘어 민주주의를 다시 점검하는 날이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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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역사추적]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왜 아직도 현재형인가 - 시사의창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고립됐다. 거리에는 계엄군이 투입됐고, 대학생과 시민을 향한 폭력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의 분노로 번졌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작된 충돌은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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