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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5월 25일, 권력이 국회를 향해 군홧발을 들이민 날

1952년 5월 25일 0시,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명분은 ‘공비 소탕’과 치안 확보였다. 그러나 그 계엄은 전선의 안보보다 권력의 생존과 더 깊게 맞닿아 있었다. 1952년 5월 25일 계엄령 선포부터 같은 해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 공포까지 전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일어난 정치적 소요사건을 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이라 기록한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재집권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냉담했고, 1952년 1월 정부 개헌안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국회 다수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고, 이승만 정권은 국회를 견제할 새로운 압박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원외 자유당, 관제 성격의 사회단체, 지방의회 결의가 동원됐고, 부산 거리는 ‘국회 해산’을 외치는 시위로 들끓었다.
계엄은 곧 정치 탄압의 도구로 작동했다. 25일 밤부터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도하던 의원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됐고, 이튿날에는 국회로 향하던 국회의원 40여 명이 탄 통근버스가 헌병대에 의해 끌려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헌병대는 ‘국제공산당 관련 정치자금’ 의혹을 내세웠지만, 훗날 이 사건은 야당 의원을 위축시키고 개헌 정국을 강압적으로 돌파하기 위한 정치적 조작의 성격이 강한 사건으로 평가됐다.
국회도 저항했다. 계엄 해제 요구와 구속 의원 석방 요구가 이어졌고, 김성수 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며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정권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국회 해산 압박과 공포 분위기를 키우며 발췌개헌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5월 26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부산지역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석방을 권고했고, 이후 미국 측도 정치 위기 완화를 요구했다.
결국 부산정치파동은 7월 4일 발췌개헌안 통과와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 공포로 귀결됐다. 대통령 직선제는 도입됐지만, 그 과정은 민주주의의 확장이 아니라 헌정 질서의 훼손이었다. 국회는 군과 경찰의 압박 아래 놓였고, 헌법은 권력자의 재선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
1952년 5월 25일의 부산은 오늘의 민주주의에도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계엄은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장치여야지, 권력을 지키는 비상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안보의 이름으로 의회를 압박하고, 민의의 이름으로 반대자를 제거하려는 순간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부산정치파동은 헌정사의 낡은 장면이 아니라, 권력이 언제든 민주주의의 언어를 빌려 민주주의를 침식할 수 있다는 경고장이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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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역사추적] 전쟁 중 임시수도에 내려진 계엄, 부산정치파동의 시작 - 시사의창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52년 5월 25일 0시,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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