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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의 연기를 걷어내고 시민이 민주주의의 숨을 되찾은 날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87년 6월 18일은 한국 민주주의사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폭력성을 시민의 이름으로 정면 거부한 날이다. 이날 전국 곳곳에서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6월 민주항쟁의 불길은 이미 거리로 번져 있었고, 시민들은 더 이상 독재 권력이 쏘아 올린 최루탄 연기 속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최루탄은 단순한 진압 장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목소리를 질식시키려는 국가폭력의 상징이었다. 거리에서 헌법 개정과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시민들에게 정권은 대화가 아닌 폭력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역사는 권력이 아니라 시민의 편에 섰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조치,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사건을 거치며 폭발했다. 특히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사건은 시민들의 분노를 임계점까지 끌어올렸다. 거리의 외침은 더 이상 학생운동의 구호에 머물지 않았다. 노동자, 직장인, 종교인, 상인, 시민들이 함께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6월 18일 열린 최루탄 추방대회는 전국적 저항의 분기점이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이날을 ‘최루탄추방 국민결의의 날’로 정했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됐다. 서울대 기록은 이날 시위에 약 150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이날의 의미는 명확하다. 시민들은 단지 최루탄 사용 중단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으로 유지되는 권력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국민을 향해 최루탄을 쏘는 현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권력이 헌법의 주인인 국민을 억압하는 모순을 거리 위에서 고발했다.

6월 18일의 함성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졌고, 끝내 6·29 선언을 끌어내는 역사적 압박이 됐다.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6월항쟁의 전국적 고조를 보여주는 핵심 장면이었다.

1987년 6월 18일은 시민이 국가폭력의 공포를 넘어선 날이다. 최루탄 연기는 눈을 맵게 했지만, 시민의 시야를 가리지는 못했다. 독재는 곤봉과 최루탄으로 거리를 막으려 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행진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직선제와 시민적 자유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역사적 유산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매일 지켜야 할 공공의 약속이다. 1987년 6월 18일은 그 약속이 피와 눈물, 분노와 연대로 쓰였음을 증언한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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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역사 추적] 1987년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 - 시사의창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87년 6월 18일은 한국 민주주의사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폭력성을 시민의 이름으로 정면 거부한 날이다. 이날 전국 곳곳에서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6월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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