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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막은 권력 앞에서, 하늘은 시민을 살리는 통로가 됐다


1948년 6월 24일,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철도·도로·수로 접근을 차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점령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서베를린은 소련 점령지 한복판에 고립된 섬처럼 놓여 있었다. 이날 시작된 베를린 봉쇄는 냉전의 첫 대규모 위기였다.

봉쇄의 배경에는 전후 독일의 질서 재편을 둘러싼 서방과 소련의 충돌이 있었다. 미국·영국·프랑스가 서방 점령지의 경제 통합과 새 통화 도입을 추진하자, 소련은 이를 자국 영향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망을 끊고 전력과 식량, 석탄 공급까지 압박했다.

그러나 봉쇄는 도시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은 항공로를 통해 식량과 연료를 실어 나르는 베를린 공수작전에 착수했다. 미국은 1948년 6월 26일 ‘오퍼레이션 비틀스’를 시작했고, 영국도 이틀 뒤 ‘오퍼레이션 플레인페어’로 가세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시민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거대한 인도주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공수작전은 시간이 갈수록 정교해졌다. 템펠호프 공항에는 한때 45초마다 한 대의 항공기가 착륙할 정도로 물자 수송이 치밀하게 이어졌다. 1949년 봄이 되자 서방은 공수작전을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소련의 봉쇄 전략은 정치적·외교적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소련은 1949년 5월 12일 봉쇄를 해제했다. 브리태니커는 베를린 공수작전이 11개월 동안 서베를린의 생명을 유지했으며, 1949년 9월 30일까지 총 232만 3,738t의 식량·연료·기계류 등 물자를 공급했다고 기록한다. 이 사건은 유럽의 동서 분단을 굳혔고,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과 독일 분단의 흐름을 앞당겼다.

1948년 6월 24일의 베를린은 단순한 국제분쟁의 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이 길을 막을 때 시민의 생존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보여준 역사적 장면이었다. 봉쇄는 도시를 고립시켰지만, 연대는 하늘길을 열었다. 억압은 통로를 끊으려 했고, 민주주의는 새로운 통로를 만들었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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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역사 추적] 1948년 6월 24일, 베를린 봉쇄 시작 - 시사의창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48년 6월 24일,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철도·도로·수로 접근을 차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점령 구역으로 나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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