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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반대 6·3항쟁과 권위주의 통치의 민낯

1964년 6월 3일, 서울의 거리는 분노한 학생과 시민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서두르자 대학가와 야당, 시민사회는 이를 ‘굴욕 외교’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섰다. 3월 24일 서울 각 대학에서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이날 절정으로 치달았다.

6월 3일, 서울 18개 대학 학생 1만5천여 명을 비롯해 학생과 시민 3만여 명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광화문 일대까지 진출했다.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등 격렬한 저항을 이어갔다. 광주와 대전에서도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의 대응은 강경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같은 날 밤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대통령 담화문에는 “오늘 20:00시를 기하여 정부는 수도 서울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남았다. 정부는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불순’과 ‘파괴’로 규정하며 국가 통치기능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계엄은 단순한 치안 조치가 아니었다. 집회와 시위는 억눌렸고, 언론과 학원은 통제의 그물 안으로 들어갔다. 55일 동안 348명을 구속한 이날의 비상계엄은 훗날 반대 세력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방식의 효시가 됐다. 

6·3항쟁은 한일협정 체결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실패로 닫히지 않는다. 이 사건은 한일회담이라는 외교 사안을 넘어 군사정권의 정당성, 민주주의의 절차, 국가 권력의 한계를 묻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전형을 만들어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64년 6월 3일의 거리는 오늘에도 묻는다.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적 동의가 생략될 때, 질서라는 명분으로 비판의 자유가 봉쇄될 때, 민주주의는 언제든 후퇴할 수 있다. 역사는 권력자의 담화문보다 거리의 시민이 남긴 질문을 더 오래 기억한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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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saissue.com/View.aspx?No=4099840

 

[김성민의 역사추적] 1964년 6월 3일, 거리의 민주주의가 계엄과 맞섰다 - 시사의창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64년 6월 3일, 서울의 거리는 분노한 학생과 시민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서두르자 대학가와 야당, 시민사회는 이를 ‘굴욕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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