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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을 막으려 했던 중도 지도자, 혜화동 로터리에서 흉탄에 쓰러지다
극단의 정치가 제거한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통일정부의 가능성이었다

1947년 7월 19일 오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성이 울렸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던 몽양 여운형이 청년 한지근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해방 이후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했던 거목의 생애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여운형은 해방을 기다린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해방 이후의 국가 건설을 준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에는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키며 치안 유지와 행정 공백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해방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 친일 세력의 재편, 좌우 진영의 극단적인 대립이 뒤엉키면서 통일국가 수립의 길은 급속히 좁아졌다.
여운형은 어느 한 진영의 독점을 경계했다. 좌파의 계급혁명 노선에도, 우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도 거리를 두었다. 그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며 이념을 넘어선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시한 목표 역시 남북 협상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통한 통일정부 건설이었다.
하지만 타협과 연대의 정치는 극단주의 세력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거듭된 협박과 테러에 시달렸다. 자택 폭파와 총격까지 겪었지만 정치적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1947년 7월 19일 발생한 암살은 그를 겨냥한 열두 번째 테러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경찰은 한지근을 체포한 뒤 사건을 사실상 단독 범행으로 종결했다. 그러나 범행을 지시하고 지원한 배후가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훗날 복수의 인물이 조직적인 범행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공소시효와 자료 부족으로 사건의 전모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특정 단체나 정치인을 배후로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여운형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좌우를 연결하던 정치적 교량이 무너지면서 타협과 연합의 공간도 급속히 소멸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동력을 잃고 그해 12월 해체됐으며, 한반도는 남북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의 길로 치달았다. 그로부터 3년도 지나지 않아 민족 전체를 참화로 몰아넣은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몽양이 추구한 정치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승리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력이 공존하면서 민족의 공동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였다. 냉전과 분단이 모든 것을 삼키던 시대에 그는 대화와 타협을 선택했다. 그것은 나약한 중립이 아니라 극단에 맞선 고독한 용기였다.
오늘의 정치 역시 혐오와 배제의 언어에 쉽게 포획된다.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토론의 광장이 아니라 폭력의 전초기지로 변한다. 1947년 7월 19일의 총성은 극단주의가 한 사회의 미래를 얼마나 잔혹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증언한다.
역사는 묻는다. 몽양 여운형이 살아 있었다면 한반도의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통일정부를 향한 하나의 중요한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암살된 정치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날 함께 쓰러진 대화와 통합의 정치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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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역사 추적] 1947년 7월 19일, 몽양 여운형 암살 - 시사의창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1947년 7월 19일 오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성이 울렸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던 몽양 여운형이 청년 한지근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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